김원필과는 두어 달에 한번 밥을 먹는다. 헤어진 지 삼 년 쯤 된 사이지만 그런 걸 신경 쓰면 아무것도 못 하지. 내가 연락하면 김원필은 늦게라도 확인하고, 알겠다고 한다. 그게 중요한 거다. 김원필이 나랑 만나 준다는 거. 불쌍해서든 미련해서든 어쨌든.
나는 이날을 위해 위치랑 평이 좋은 음식점도 꼼꼼히 찾아 놓는다. 오늘은 신도림역 근처에 양꼬치집이다.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 간다. 쇠꼬챙이가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부지런히 돌아가는 걸 보다가, 적당히 먹음직스러워 보일 때 김원필에게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거 딱 잘 익었네. 지금 먹어.”
“도운아.”
“응?”
“나 결혼해.”
근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때릴 줄은 몰랐지. 김원필이 주섬주섬 가방을 뒤지더니 매끈한 봉투 하나를 내민다. 나는 그걸 멍하니 바라본다. 어떻게든 반응을 해야 하는데 고장난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다. 황당해서. 뭐, 형이 뭘 해?
“더 일찍 말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안 나서.”
김원필이 살짝 웃는다. 반소매 셔츠 차림에 이마를 드러낸 김원필은 언제나처럼 잘생겼다. 조금 피곤해 보이니까 두배는 섹시하고. 이런 얼굴로 결혼을 말하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여자친구랑?”
“그치, 그럼 누구랑 해.”
“만난 지 얼마 안 됐잖아.”
“그런가? 식 올릴 때 되면 일 년인데.”
“아니, 그래도….”
김원필이 눈썹을 까딱거린다. 이건 작작 하라는 신호.
“어… 축하해.”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김원필이 내미는 봉투를 받는다. 안에는 역시나 꽃무늬 새겨진 청첩장이 들어 있다. 은근히 화려한 디자인은 김원필 취향일까, 신부 취향일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생각에 잠겨서 청첩장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린다. 적어도 반년 여유는 두고 주는 줄 알았더니, 날짜는 한 달 뒤다.
“일찍도 알려준다.”
“좀 늦긴 했지. 바쁘면 안 와도 돼, 진짜로.”
김원필이 손을 휘휘 내젓는다. 아마 김원필도 진짜로 내가 오길 바라서 주는 건 아닐 거다. 그냥 알아나 두라 이건가. 왜 굳이 만나서 줬는지는 모르겠다. 표정 관리 힘들게. 나는 핸드폰을 들어서 캘린더 앱을 뒤적이는 시늉을 한다. 습, 혀를 차며 고개 한 번 갸우뚱거려 주고.
“그때 시간이 날지 모르겠네…. 갈 수 있으면 갈게.”
어차피 캘린더는 깨끗하다. 업무 스케줄은 개인 핸드폰에 저장해두지 않는다. 그래도 애매한 대답으로 회피하는 편이 낫다. 간다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고 안 간다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니까. 제일 이상한 건 김원필과 이렇게 지내는 나지만.
*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어지럽다. 청첩장 받은 뒤부터 술은 나만 마셨으니 당연하다. 그래도 나는 씩씩하게 걷는다. 김원필 앞에서 흐느적거리는 건 모양 빠져서 싫다.
둘 다 차는 두고 왔다. 김원필은 앞에 보이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탈 거고, 나는 뭐… 어떻게든 가겠지. 한 걸음 한 걸음 떼는데 뒤따라오던 김원필이 한숨을 쉰다.
“야, 윤도운.”
꺼칠한 투로 부르더니, 팔을 뻗어서 내 손목을 잡는다. 못마땅한 빛이 깃든 까만 눈동자.
“천천히 가, 너 취했어.”
취하면 뭐. 데려다 줄 건가? 그것도 아니면서. 예비 신부가 기다리는 예쁜 신혼집으로 퇴근하실 거면서 말이 많으시네요. 나는 뚱한 얼굴로 김원필을 노려본다. 다정하게 구는 김원필은 나쁘다. 차라리 미워하고 싶은데, 착하고 귀여운 것들은 쉽게 미워지지도 않는다. 우리 집 호순이처럼. 토리처럼.
“안 취했거든.”
“…….”
“나 택시 탈 거니까 형 먼저 가.”
잡힌 팔을 가만히 내려다보니까 김원필이 마지못해 손을 놓는다. 나는 꾸역꾸역 걷는다. 도운아, 뒤에서 김원필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끝까지 모른 척한다. 돌아보면 마음 약해지니까. 무릎이라도 꿇고서 빌고 싶어지니까. 새신랑한테 그러면 못 쓰지.
이 년 알고 지냈고 오 년 사귀었고 그리고 또 삼 년이니까, 자그마치 십 년이다 십 년. 형은 그걸 끊어내는 게 쉬워? 어떻게 했어, 방법 좀 알자. 나는 도저히 그게 안 되니까….
나는 계속 걷는다. 택시 정류장이 어디쯤에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걷는다. 그러다 보니 이름 모를 다리 위에 서 있게 된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본다. 넓은 강이 흐른다. 여기가 안양천이었나. 가방을 뒤적여 아까 김원필에게 받은 청첩장을 꺼낸다. 졸졸졸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다가 팔을 높이 들어 아래로 던진다. 추락한 청첩장이 강물에 닿아 젖어 들고, 수면 위를 둥둥 떠다니다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춘다. 저건 흘러 흘러 어디까지 갈까. 바다까지 가나. 어쨌거나, 김원필 결혼식에는 안 간다. 세상이 끝나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안 가, 절대.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지른다. 등을 푹 수그리고 힘 빠진 다리를 끌며 아무 방향으로나 걷는다. 이렇게 걷다 보면 집에 닿을 것이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나는 노랫말을 흥얼거린다.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네….
*
세상은 끝나지 않았고 나는 김원필 결혼식에 와 있다. 왜 그랬지. 오기 같은 건 아닌데. 시끄러운 사람들 틈에서 휩쓸리다가 축의금 봉투를 전달한다. 방명록에 뭐라고 쓸 지 고민하다 그냥 아무것도 안 적는다. 멀찍이 번듯한 차림의 김원필이 보인다. 환한 얼굴로 하객을 맞이하는 중이다. 쿨럭쿨럭 기침을 한 나는 뺨을 꼬집어 본다. 모든 게 꿈 같아서.
예식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식이 시작되고 나서야 하객석에 앉는다. 어두운 홀 안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반짝반짝 빛난다. 곳곳에 비치된 꽃장식이 아름답다. 척 봐도 돈 깨나 줬을 것 같은데, 신부 쪽이 잘 사는가 보지.
행진곡이 울려 퍼지고 신랑 김원필이 등장한다. 머리를 뒤로 넘기고 까만 턱시도를 입고. 얼씨구, 나비넥타이까지 맸네. 나는 마지못해 박수를 친다. 식장 입구부터 주례석까지 찬찬히 걸어온 김원필이 몸을 돌려 하객을 바라본다. 눈동자에는 어떤 벅참마저 엿보인다.
나는 옛날 생각에 잠긴다. 진짜 내 말처럼 됐네. 내가 맨날 형 들들 볶았잖아, 나 게이 만들어놓고 형은 여자도 되는 게 밉다고. 갈 거면 차라리 빨리 가버리라고. 가서 결혼을 하든 아들딸 둘씩 낳든. 사실 그거 다 거짓말이었어. 질투 나서 못되게 군거야. 형도 알았지. 그러면서 왜 결혼한단 말을 해. 청첩장을 줘. 그럼 꼭 내가 벌 받은 거 같잖아.
어쩌면 나는 남은 삶 내내 김원필을 미워할지도 모른다. 끔찍하다. 미워지지 않는 사람을 미워하며 사는 인생이라는 건.
“이어서, 신부 입장이 있겠습니다.”
장내가 조용해지며 아름다운 선율이 흐른다. 드레스를 입은 순백의 신부가 등장한다. 모두의 시선과 환호가 쏟아지고 저마다 핸드폰을 들어 그 모습을 찍는다. 김원필을 바라보고 있는 건 나뿐이다. 시선이 마주친다. 천천히 커지는 동그란 눈. 박수를 치면서, 김원필을 보면서. 나는 어떤 생각을 했더라. 이게 다 꿈이라면 어떨까, 모든 게 사라져 버리면 어떨까, 그런 것들.
그리고 거짓말처럼, 시간이 멈춘다.
*
모두가 정물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모든 게 멈췄다. 사람들도, 물건들도. 거대한 미술관 한가운데 떨어진 것 같다. 나만 혼자. 이게 뭐지? 약간의 혼란과 공포가 몰려든다. 진짜 천벌이라도 받았나. 이상한 생각을 해서. 곧 결혼하는 김원필을 앞에 두고 못된 욕심을 부려서? 그러나 그 생각은 곧 사그라든다. 바삐 움직이던 눈동자가 김원필에게 이르러 정지한다. 김원필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살아 움직이면서.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김원필에게 다가간다. 예식장에는 내 발자국 소리만 들린다. 김원필 손을 붙들고, 나는 무작정 바깥을 향해 달린다. 신부 옆을 지나쳐 빠르게 버진로드 위를 가로지른다. 사실 이런 거 한 번은 해보고 싶었어. 결혼식장에서 신랑 손 잡고 뛰어나오는 거. 간지나잖아. 드라마 같고.
다행히 예식장 문은 부드럽게 밀린다. 이 건물 안에 옴짝달싹 못 하고 갇혀버리나 걱정했는데 뭐든 손을 대면 원래의 무게감처럼 느껴진다. 건물을 빠져나오니 회색 도로가 펼쳐진다. 주위를 둘러본다. 지나가는 행인, 유모차, 푸드덕대는 비둘기 같은 것들이 얼어붙어 있다. 그제야 실감한다. 세상에 나랑 김원필, 둘만 남겨진 거라고.
“네가 그랬어?”
김원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나는 그제야 김원필을 바라본다. 어떻게든 대답해서 안심시켜주고 싶은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에겐 시간을 멈추는 초능력 따위는 없다. 근데 세상에 딱 나랑 형만 남았잖아. 내가 바란 게 아니라고 할 수 있나?
“… 모르겠어.”
식장 앞 도로에는 딱정벌레를 닮은 차가 서 있다. 김원필과 신부의 몫이다. 하얗고, 꽃장식 달렸고. 웨딩카 훔쳐 타는 건 찝찝한데. 하지만 나는 차를 두고 왔고, 남의 차를 훔쳐 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행히 차 문은 무리 없이 열린다. 아까부터 뭐든 생각한 대로 술술 풀리는 걸 보면 여긴 정말 내가 만들어낸 환각이거나, 꿈속인 건가.
“일단 타.”
조수석을 턱으로 가리키자 김원필이 머뭇거린다. 신부가 서 있을, 가족과 친구들과 지인들이 박수를 치다 딱딱하게 굳어버렸을 예식장 안쪽을 흘금댄다.
“… 어떻게 해야 돌아오는지 알 것 같아서 그래.”
“…….”
“어차피 형도 다른 방법 없잖아.”
망설이던 김원필은 결국 차에 올라탄다. 조수석 문을 닫은 나는 운전석에 탄다. 운전도 텔레파시 같은 걸로 못 하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우선은 상식적으로 굴기로 한다. 차는 부드럽게 출발한다.
*
김원필과는 스무 살 때 만났다. 같은 과였고, 김원필이 한 학년 선배였다. 나이도 딱 한 살 위. 새내기에게는 어렵게 느껴질 법한 관계인데 김원필은 첫 만남부터 나를 옆구리에 끼고 살았다. 귀엽다면서. 사실 그냥 끼고 산 건 아니고, 주물럭거리고 쪼물락거리고 쓰다듬고 예뻐했다.
나는 얌전히 김원필을 따라다녔다. 김원필은 그 당시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심지어 데이트에도 따라다녔다. 김원필과 동갑인 그 누나는 성격이 아주 시원시원해서,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재밌다면서 뒤로 넘어가곤 했다. 그렇게 셋이 형 누나 하면서 하하호호 싸돌아다닌 것까지는 좋았으나.
문제는 그 뒤에 발생했다. 셋이서 내 자취방에 오손도손 모여 노가리 까고 소주병 까다가 기절했을 때, 화장실 간다고 깬 나는 발에 뭐가 걸려서 우스꽝스럽게 엎어졌다. 엎어진 내 옆에는 김원필이 누워있었다. 이 형은 왜 마룻바닥에서 잠을 자지.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김원필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귀여운 인상과는 다르게 뼈대가 두드러진 얼굴을. 아주 기다란 눈매와 끝이 동그란 코, 다물린 입매와 단단한 턱. 꼭 영화배우 같이….
불현듯 속이 울렁거렸다. 뱃가죽 아래서 비둘기가 푸드덕대는 것 같았다.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허겁지겁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변기를 붙잡고 한참 게워내면서 깨닫고야 말았다. 내가 김원필과 키스하고 싶어 한다는 무시무시한 사실을.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김원필에게 사실대로 털어놓거나 도망치거나. 나는 후자를 택했다. 첫 학기만 마치고 군대에 갔다. 남자 좋아하는 것도 임자 있는 사람 좋아하는 것도 스무 살이 견디기에는 좀 빡셌다. 일단 눈앞에서 치우는 게 급선무였다.
김원필은 내가 복학한 다음 학기에 군 휴학을 마치고 돌아왔다. 입대 직전에 여자친구랑 헤어졌다는 얘기도 건너건너 들렸다. 그렇지만 그게 뭐. 친하게 지내던 형이랑 키스하고 싶었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나? 없지. 기껏해야 남자도 된다는 거나 깨달았을 뿐이지. 도 닦으면서 마음이나 접어야지. 차곡차곡.
같이 아는 사람 많은 건 문제였다. 김원필이랑 친하게 지내던 무리 중 학교에 남아있는 사람들끼리 술판을 벌였다. 어쩌다 보니 나도 함께했는데 김원필과는 일부러 먼 곳에 앉았다. 가급적 아무 말도 섞지 않고 돌아가는 게 목표였다. 그렇지만 원래 인생이란 게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는 법이라.
‘어떻게 연락 한 번을 안 해?’
‘…….’
‘섭섭하게.’
술 깨려고 가게 바깥을 서성이는데 김원필이 말을 걸었다. 만나서 반갑다, 잘 지냈냐, 오랜만이다, 따위의 간단한 아이스 브레이킹도 없었다. 어지간히 서운했던 모양이지.
짧아진 머리 말곤 김원필은 전과 똑같았다. 나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말 같지 않은 핑계를 들먹거렸다. 바빴다, 아팠다, 어쩌고저쩌고….
‘거짓말하지 말고.’
‘…….’
‘일부러 피한 거잖아. 내가 뭐 잘못했어?’
김원필이 가까이 다가왔다. 술 냄새가 났다. 나는 한두걸음 물러서다가 위기감을 느꼈고, 김원필 어깨를 붙들고 쭉 밀어냈다. 김원필이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그런 게 아니고….’
‘아니면. 나랑 다시 친하게 지낼 거야?’
‘아니.’
‘왜?’
‘…….’
‘빨리 말해. 말할 때까지 기다릴 거야.’
김원필이 팔짱을 딱 꼈다. 목소리가 제법 단호했다. 나는 귀가 시뻘게진 채로 고개를 저었다.
‘말 안 해.’
‘해.’
‘안 해.’
‘진짜?’
‘… 어.’
김원필의 표정이 점점 진지해졌다.
‘너 진짜 뭐 있구나?’
‘……’
‘빨리 말해.’
‘아, 싫다니까. 사람이 왜 이렇게 질척거려….’
‘어, 난 좋아하는 사람한테 원래 질척거려. 말할 때까지 여기 서 있을 거야. 그니까 지금 말해. 말해야 사과하든 고치든 하지.’
거기까지 가니 나도 슬슬 화가 났다. 남의 속도 모르는 김원필이 미워서. 말하지 않는 게 이쪽이나 저쪽이나 속 편할 텐데, 굳이 굳이 치부를 들추려는 게 짜증 나서. 마른세수를 벅벅 하다가 담벼락에 등을 툭 기댔다. 될 대로 돼라, 그런 마음이었다.
‘형 좋아해서 그랬는데 왜.’
‘……’
‘나 호모 새끼라 이런 거에 꼴리니까 하지 말라고….’
그 다음에 날아올 것을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주먹, 무시, 거절 혹은 위로. 예상은 전부 빗나갔다. 김원필은 팔을 뻗어 얼굴을 가린 내 손을 잡아 내렸다.
‘뽀뽀해볼래?’
‘어?’
‘어차피 너 이제 못 보는 거면… 확인 좀 하게.’
아무래도 김원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황당해서 멍해진 나에게 김원필이 조금씩 틈을 좁혀 왔다. 맞닿은 건 푹신한 입술. 아랫입술을 두어 번 빨다가 떨어져 나갔다. 확인은 김원필이 했는데 애꿎은 윤도운만 깨닫게 되었다. 좋다고, 김원필이 좋다고. 도망친 게 무색하게 마음은 제자리였다.
애매한 입맞춤이 끝나고, 김원필의 표정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끙, 앓는 소리. 이어지는 고백에 나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야, 나도 너 좋아하는 것 같은데….
*
김원필도 나도 남자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그나마 김원필은 연애 몇 번 해봤으니 사정이 나았지만 첫 연애였던 나에겐 쓸만한 데이터라곤 전혀 없었다.
어느 정도의 거리감으로 다가가야 하는지는 항상 애매했다. 우리는 평소처럼 웃고 떠들고 김원필은 나를 조물딱거렸지만, 이건 친구 사이였을 때도 똑같았다. 사귀는 사이는 좀 더 특별해야 하는 거 아닌가? 사귀는 사이를 누구랑 해본 적은 없지만 다들 그렇다고 하니까.
무작정 덤벼들 수는 없었다. 이건 믿음의 문제였다. 그때 나는 김원필을 못 믿었고 그래서 어떻게 나올지도 예상을 못 했다. 나야 백지상태에서 정체성 형성했다 쳐도. 김원필은 아니잖아. 언제라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으니 무르자, 소리 들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도운아.’
‘…….’
‘우리 만난 지 며칠이나 됐지?’
그날은 자취방 문을 열자마자 김원필이 서 있었다. 새까만 눈에서는 어딘지 단단한 결심이 엿보였다. 나는 재빨리 오늘이 무슨 기념일 같은 거였는지 되짚어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특별할 건 없는 날이었다. 나는 눈치를 보다 답했다.
‘한… 백일 좀 안 됐지.’
‘그치.’
‘어… 형 뭐 칠십칠일, 팔십팔일, 그런 것도 챙기는 성격이야?’
내가 물으니까 김원필이 눈썹을 들더니, 얼굴을 다 구기며 시원하게 웃었다. 으하하하. 아니야, 그런 거. 김원필은 곧 예의 단정한 얼굴로 돌아와 어깨를 으쓱였다.
‘너 나랑 안 자고 싶어?’
‘어, 어?’
나는 바보처럼 말을 더듬었다. 김원필 말처럼 오늘이 무슨 기념일인 것도 아니고 나는 방금 학교를 다녀왔는데 이런 걸 물어보다니.
게다가, 어떻게 대답해도 이상한 질문이었다. 어, 자고 싶고 빨고 싶고 형 자빠뜨려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싹 핥아먹고 싶어, 라고 말할 수도 없고 아니 우리 사이에 좀 그렇지, 선비처럼 말해도 이상했다. 아무튼 이상한 질문을 던진 김원필은 오래 기다리지 않고 다시 물었다.
‘별로야?’
‘…….’
‘섭섭하네….’
김원필의 눈썹이 팔자로 축 처졌다. 안 그래도 내려가 있는 눈꼬리가 더 아래로 향했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나를 앞에 두고 김원필이 별안간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었다. 흐물흐물한 천은 김원필 다리를 타고 미끄러져 투욱 바닥에 내려앉았다. 전에도 앞에서 훌렁훌렁 옷 갈아입은 적은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도운아, 눈 감지 말고. 자세히 한 번 봐 봐.’
‘아니, 대체 뭘….’
‘진짜 아무 느낌 없어?’
김원필 고집은 아무도 못 말렸다. 대답하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버티고 서 있을 게 뻔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비쩍 마른 김원필이 맨몸을 드러낸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뼈가 도드라진 어깨와 판판한 가슴, 납작한 배. 어딜 보나 볼륨감이라고는 없었고 애초에 그럴만한 분위기도 아니었으나, 나는 그 앞에서 발기해 버리고 말았다. 시선을 내려 앞섶을 확인한 김원필이 빙그레 웃었다. 김원필이 양팔을 활짝 벌렸다.
‘일루와, 우리 도운이.’
‘이씨….’
나는 감탄사인지 욕인지 모를 말을 뱉고 김원필에게 다가가서, 양 뺨을 낚아채듯 붙잡고 키스했다. 사귄 후로 키스는 몇 번 해보았어도 그다음을 상정하고 하는 건 처음이라 손이 막 떨렸다. 흐흐, 김원필이 웃으면서 손등을 감싸 쥐는 게 짜증 났다.
김원필과의 섹스는 조금 아팠고 무지 좋았다. 움직일 때마다 툭툭 불거진 뼈끼리 부딪혔는데 신경도 안 쓰일 만큼 흥분했다. 그때까지 남자 좋아하는 걸 부정하던 아주 작은 마음조차 먼지처럼 휩쓸려 사라졌다. 나는 답도 없이 김원필이 좋았고, 꼴렸고, 그리고….
*
김원필은 조수석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눈을 뜬다. 늦여름의 태양은 세상이 멈추어도 여전해서 우리는 자꾸만 인상을 찡그리게 된다. 김원필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다. 그렇게 운전하고 있는 나와 뻥 뚫린 도로를 번갈아 보다가,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나 옛날 꿈 꿨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김원필이 어떤 꿈을 꾸었든 여기가 더 비현실적이니까. 시간이 멈췄고 사람들은 얼어붙었고 내가 모는 건 김원필의 웨딩카다. 일단 주말 고속도로에 차 하나 없이 휑하다는 것부터가. 내가 잡은 핸들도 누가 뒤에서 조종하는 건 아닐까, 스멀스멀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우리 어디 가?”
차창 밖을 바라보다가 김원필이 묻는다. 납치 당한 사람 치고는 태평한 말투다.
“에버랜드.”
“어?”
“좀 걸려. 더 자도 돼.”
나는 간단히 대답한다. 김원필은 오묘한 표정이 되어 입을 다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까 꾸었다던 옛날 꿈을 떠올리나. 착한 우리 도운이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그런 거? 나는 애초에 별로 착한 남자친구는 아니었으니까, 그건 아닌가.
“복수하러 가?”
김원필이 담담하게 묻는다. 핸들을 쥔 내 손에는 힘이 들어간다.
“복수는 무슨 복수… 형 나한테 뭐 잘못했어?”
“너 두고 결혼하잖아.”
나는 잠깐 숨을 멈춘다. 말문이 막힌 걸 들키지 않으려고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꾸민다.
“… 그걸 아는 사람이 청첩장을 주나.”
“정 떼려고 그랬어.”
“…….”
“우리 그동안 이상했잖아. 헤어진 지 몇 년 됐으면서 계속 만나는 것도, 친구인 척 편한 척하는 것도….”
“내가 그래 달라고 한 거잖아.”
“그러니까. 그게 이상하다고. 네 부탁이면 안 들어줄 것도 들어주잖아.”
누가 들으면 오해할 법한 말을 김원필은 잘도 한다. 하여튼 다정도 병이야. 나는 속으로만 궁시렁거린다. 어쨌든 모든 게 멈춰 있는 세상에서 웨딩카의 바퀴만은 부지런히 굴러가고. 나와 김원필은 에버랜드로 가고.
*
김원필은 싫어하는 게 많지 않았다. 특히 내가 하는 짓은 웬만하면 귀엽다며 웃어넘겼다. 내가 양은 냄비처럼 백 번 끓고 백 번 식을 때 김원필은 늘 허허실실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 대신 몇 가지에서는 양보가 없었다.
김원필을 화나게 만드는 걸 꼽아 보자면… 첫 번째는 형 떼고 부르는 거. 장난으로 몇 번 원필아 원필아 그랬다가 된통 혼난 뒤로는 그건 안 했다. 두 번째는,
‘윤도운!’
김원필이 뒤에서 내 어깨를 잡았다. 내가 털어내고 씩씩거리자 다시 붙잡았다. 여기는 캠퍼스 안이고 그래서 누구라도 우릴 볼 수 있을 텐데 나는 그런 것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김원필이 전 여자친구랑 있는 걸 보자마자 화가 머리 끝까지 났으니까.
며칠 전에 김원필이 전여친이랑 밥 먹은 걸 알게 됐다. 김원필이 말한 건 아니고 그냥 건너 건너 소문처럼 들었다. 선배 몇에 교수님까지 껴서 만든 자리긴 했는데, 대충 앞뒤 사정 짐작이 갔지만 심술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전여친 쪽이 먼저고 나는 나중이라서. 도둑이 제 발 저린 셈이었다.
‘왜 말 안 했어?’
‘네가 속상해하니까.’
김원필을 찾아가 따지니 이런 대답이나 들었다. 하기야 사실대로 털어놓았어도 화가 났을 테니 맞는 말이긴 했다. 김원필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내 표정을 살폈다. 화가 났나, 많이 났나, 어떻게 풀어줘야 하나. 그런 걸 고민하는 중이었는데 우습게도 그걸 구경하는 동안 마음이 점차 누그러졌다. 잘생긴 얼굴이라는 건 이래서 무서웠다.
‘미리 말 못한 건 미안해. 앞으로는 이런 일 없게 할게.’
김원필은 시간을 들여 충분히, 어떤 자리였는지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설명해 주었다. 걱정할 거 하나도 없다면서.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이 만든 자리라는데 어깃장 놓고 뛰쳐나올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다고 화가 다 풀린 건 아니고, 화가 나긴 나는데 건덕지가 없어서 못 낸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지금 딱 건수를 잡은 것이다.
나는 다섯살 어린애처럼 김원필과 눈이 마주치길 기다렸다. 그리고 김원필이 나를 보자마자 보란 듯이 뒤돌아 도망갔다. 사실 도망보다는 지랄에 가까웠다. 나 좀 잡아 달라고. 나 좀 잡아서 내 마음 알아주고 달래도 주라고. 그런 마음으로 도망가는 거였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나름 착하다 소리 듣는데 이상하게 김원필 앞에만 서면 땡깡을 부리고 싶었다. 이게 다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는 거지.
‘도운아, 그런 거 아니야. 과사 들렀다가 우연히 만났는데 전해줄 게 있어서….’
‘아, 됐다고.’
나는 또 뿌리치고, 그러면 김원필은 다시 달라붙고. 그러면 나는 또 뿌리치고 일부러 느리게 걸어서 도망쳤다. 잡아줄 걸 바라면서 하는 술래잡기처럼.
‘너 왜 그래… 진짜 나 안 봐줄 거야?’
‘혼자 갈래.’
‘도운아, 형 봐. 잠깐 얘기 좀 해.’
나는 김원필을 노려보다 다시 걸어갔다. 김원필이 내 앞으로 뛰어들었다. 별로 길지도 않은 양팔과 양다리를 쫙 벌려 필사적으로 앞을 막아섰다. 나는 그제야 멈춰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뭐, 왜.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한다 했잖아. 근데 설명할 게 있어?’
‘윤도운.’
‘…….’
‘너 알잖아, 그런 거 아닌 거. 너는 나 알잖아.’
‘…….’
‘근데 왜 이렇게까지 해. 나한테 속상한 거 있어?’
김원필은 곧잘 핵심을 짚어내곤 했지. 이번에도 그랬다. 맞다. 나는 김원필이 아무 잘못 없는 걸 알았다. 같은 학교 다니고 같은 수업 듣는 처지에 말도 섞지 말라는 건 억지였다. 그런데도 이러는 거였다. 미워서. 불안해서. 창피해서. 짜증 나서. 사춘기는 지났는데 오춘기가 왔나…. 김원필이 내 앞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손을 잡았다. 평소에 형인 거 까먹을 정도로 장난치면서 노는데 이럴 때 김원필은 한참 형 같았다.
‘도운아.’
‘…….’
‘도망가도 돼. 앞으로 또 그래도 돼. 너 그렇게 도망가도 내가 잡으러 갈 수 있어. 백 번도 갈 수 있어. 너 마음 풀릴 때까지 싹싹 빌고 달래줄 수도 있어.’
‘…….’
‘근데… 내가 잡으면 뿌리치지는 마. 그건 하지 마. 그럼 나도 너 못 잡아….’
간신히 틀어막고 있던 김원필 눈물샘이 터지고 말았다. 두 뺨을 타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 코를 훌쩍이던 나는 더럭 겁을 집어먹고서, 왜 울어, 중얼거리며 젖은 얼굴을 옷소매로 닦아주었다. 병 주고 약 주는 꼴이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했다. 부끄럽고 미안하고 화가 나면서도 나는 안심했다. 김원필이 나를 잡으러 왔으니까. 앞으로도 잡으러 올 거라고 했으니까. 그야말로 한심한 화해였다.
*
놀이공원의 입구는 적막하다. 색색의 건물 사이 사람들은 멈춰 있고 음악조차 흘러나오지 않는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언뜻 무섭게까지 느껴진다.
우리는 석고상 같은 사람들을 피해 놀이공원에 입장한다. 주말치고는 인파가 많이 몰리지 않아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대면 어디든 다닐 만은 하다. 손을 흔드는 직원들마저 얼어붙어 있어 입장료는 따로 필요 없다.
“저거 타자.”
나는 놀이공원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관람차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김원필이 그걸 보더니 얼굴을 찡그린다.
“저거 이제 운행 안 해. 멈췄어.”
나는 바보 같은 표정을 짓는다. 몰랐던 일이니까. 몇 년 전에는 분명 운행을 했는데. 그때는 분명히 있었는데 왜 지금은 없냐고. 나는 고민에 빠진다. 어차피 꿈인데, 멈춘 관람차가 움직이는 일도 일어날 수 있지 않나.
“뭐 어때, 일단 가 보자.”
막무가내로 김원필을 끌고 간 곳에는 ‘우주 관람차’라는 허름한 간판이 붙어 있다. 정말 운행을 멈춘 듯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관리하는 직원도 없다. 그저 조형물처럼 남겨져 있는 관람차들 중 가장 가까운 쪽으로 다가가 문을 당겨 본다. 잠겨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나 손쉽게 열린다.
“진짜 열리네.”
김원필이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말을 뱉는다. 나는 그제야, 이 꿈은 나를 위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김원필과 나는 차례로 관람차에 올라탄다. 김원필은 이제 모든 것에 순순하다.
문이 닫히고, 수년을 움직이지 않았다던 관람차는 서서히 떠오른다. 반투명한 바닥 아래 땅이 점점 더 멀어진다. 땅에 붙어있는 놀이기구와 사람들과 나무들과 꽃들과, 아무튼 그런 것들이 멀어진다. 멀어지고 멀어져서 잘 보이지도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정말 우주 한가운데 김원필과 남겨진 듯한 착각에 빠진다. 우리는 여기서 뭘 해도 상관없지 않나. 꿈속이니까. 아무도 우리를 지켜보지 않으니까.
*
김원필은 자기 생일날 애인과 놀이공원에 가는 로망이 있었다. 가장 하고 싶은 건 대관람차 안에서 키스하기. 전 여자친구랑 해보지 않았느냐고 삐딱하게 물었더니 정색을 해서 더 말은 못 했다. 나중에 김원필이 슬쩍 와서 덧붙였다. 안 했어.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려고 아껴뒀단 말이야.
김원필의 로망 실천하기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생일이 다가올 때마다 번번이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지독한 감기에 걸리거나 폭우가 내리거나 엄마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거나…. 김원필의 로망은 케이크 썰기, 촛불 끄기, 선물을 교환하고 입맞춤을 나누는 평범한 행사로 대체되었다.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열의가 없었는지도 모르고. 우리는 앞으로도 몇번의 몇번의 몇번의… 생일을 함께할 테니까. 그냥 그건 감이었다. 그럴 것 같아서 나는 아이러니하게 김원필에게 소홀할 수 있었다. 소중해서 소홀하다니. 지금 생각하면 웃겼다.
연애가 끝나던 해에도 어김없이 일이 생겼다. 김원필 생일 얼마 안 남긴 시점에 좀 크게 싸웠다. 사유는 별거 없었다. 김원필의 지인이 결혼을 했고, 그 소식이 흘러가듯 화제에 올랐고, 말이 이어지다 보니 배배 꼬이는 마음에 내가 또 날 선 소리를 했다. 둘 다 피곤했던 탓에 목소리가 높아졌고, 감정은 격해졌고, 그럴 거면 그만하던가, 류의 말을 남기고 내가 그 자리를 뛰쳐나오는 것으로 일단락되는 흐름.
그렇게 며칠을 냉전이었다. 왜 나는 김원필만 끼면 눈이 뒤집어지는가. 세상에서 제일 가오 없는 짓을 골라서 하는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지만 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냥 멍청해서 그렇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멍청한 게 자존심은 세서 나는 사과할 타이밍을 재고 또 쟀다. 어떻게 해야 적당히 자존심도 챙기면서 다시 김원필과 하하호호할 수 있을지를 궁리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상황은 나빠지려고 하면 얼마든지 나빠질 수 있었다. 그건 굉장히 의외의 방식으로도 가능했다. 김원필이랑 연락 안 하는 동안 나는 팔자에도 없는 고백을 받았다. 누구였냐면 같이 하남돼지에서 알바하는 여자애였다. 집 방향이 같아서 몇 번 같이 갔는데 그날은 유난히 우물쭈물하더니 나를 흘금대다가 좋아해요, 그랬다. 나는 할 말이 없어서 목덜미를 벅벅 긁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러워서는 아니고 미안해서. 거절의 말을 고르고 있는데 딱 걸렸다. 김원필한테.
하필 김원필은 그날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필 아는 동생은 집 앞에서 고백을 했고. 하필이면.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이냐…. 나는 딱딱하게 굳은 김원필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백해 준 애에게 손을 내저었다. 내일 얘기하자, 내일. 여자애는 어쩔 줄 몰라 하더니 헐레벌떡 뛰어 자기 집 쪽으로 사라졌다.
‘설명해.’
뒷모습을 지켜보다 김원필에게로 갔더니 대뜸 그랬다. 나는 눈을 끔뻑거리다가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설명해야 하는 거 아는데. 오해하기 딱 좋다는 것도 아는데 괜히 억울했다. 왜냐면 여자 만나던 건 김원필이고 그거 때문에 마음고생 하던 건 나니까. 나는 김원필 말고는 연애해본 사람도 섹스해본 사람도 없었다. 꼬인 부분을 푹 찔리니 반발심이 고개를 들었다.
‘와… 되게 무섭네. 그동안 연락 한번을 안 하더니.’
‘설명하라고.’
‘다 봤잖아.’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할 거냐니.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지.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뭔 소리야….’
‘똑바로 말해. 쟤랑 잘해볼 거야?’
‘어?’
‘너 나한테 그만하자고 했고, 며칠째 연락 안 되더니 오늘 본 게 이거야. 내가 어떻게 생각해야 돼?’
김원필의 말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잘해보긴 뭘 잘해봐. 내가 형을 두고 누구랑 잘해봐. 연락은 나만 안 했나. 그쪽도 안 하셨잖아요. 섭섭하게 진짜…. 사람은 기대하는 만큼 실망하는 법이라, 집 앞까지 찾아온 김원필에 반색했다가도 이런 말 한마디에 서운해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가 싫어졌다.
‘뭐, 나는 그러면 안 돼? 형은 맨날 여자랑 시시덕거리면서… 내가 화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그거랑 그거랑 같아? 걔네는 친구고… 재는, 너 좋다고 했잖아.’
‘…….’
‘확실히 해.’
‘뭐를.’
‘네가 그만하자고 했고, 해명할 생각 없는 거면… 진짜 끝이야.’
‘…….’
‘나 사과하러 온 거야. 잘 생각해.’
나는 아니꼬운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사과하러 왔다면서 그런 얼굴 할 건 뭐야. 형도 알고 있는 거지. 내가 더 좋아하는 거. 처음도 마지막도 형이어서 어디도 못 갈 거 알고… 그래서 이런 식으로 구는 거잖아.
‘어, 잘해볼라고.’
‘뭐?’
‘형도 되는데 나는 못할 게 뭔데. 형한테 코 꿰여서 오 년 썩혔는데, 나도 이제 청춘 즐기고 좋네.’
나는 뒤를 돌았다. 뒤를 돌아서 도망치듯 걸었다. 그래, 이것도 지랄 맞았다. 잡아주길 바라면서 지랄하는 거 맞았다. 근데 너무했잖아. 더 좋아하는 사람은 난데 연락 좀 안 했다고 헤어지니 마니 하는 것도 김원필인데. 이런 거까지 못 하게 하면 너무했다. 김원필은 나를 붙잡았다. 언제나처럼.
‘윤도운.’
‘……’
‘마지막으로 묻는 거야.’
‘……’
‘진짜 갈 거야?’
그러니까 이건 시험이다. 김원필은 언제나 내가 선을 넘는지를 시험했다. 넘으면 끝이라는 걸 깔아놓고, 무서운 목소리로 묻는 거지. 진짜 넘을 거냐고. 그럼 나는 지레 겁을 집어먹고선 아니야 내가 미안해,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선을 넘으면 끝이니까, 그러면 안 되니까, 헤어지기 싫으니까.
근데 형, 이건 좀 속상하다. 나한테는 안 그러면 안 되나. 내가 아무리 별로고 못났고 질투하고 선을 넘어도. 나는 다 봐주면 안 돼? 나 윤도운이잖아. 형한테 특별한 사람이잖아. 나는 형이 나를 계속 봐줬으면 좋겠어. 특별 취급하면 좋겠어. 그동안 만났던 누구보다 내가 더 소중해서, 그런 룰 같은 건 무시했으면 좋겠어. 응?
‘어, 갈 거야.’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김원필 손을 털어내고 돌아섰다. 시위하는 사람처럼 행진하는 사람처럼 발길 닿는 대로 나아갔다. 그러면서 기다렸다. 그래도 김원필은 나를 안 버리겠지, 하고.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허무한 끝이었다. 김원필은 더 이상 나를 붙잡지 않았다. 붙잡지 않는 것뿐만 아니고 완전히 인생에서 치워 버렸다. 하루 이틀 일주일이 흐르자 초조해진 나는 메시지도 남기고 전화도 걸어봤지만 이미 차단당한 뒤였다. 나는 질질 울었다. 처음에는 화가 나서 울었다. 결국 김원필한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그다음엔 무서워서 울었다. 김원필 없으면 어떻게 살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어서.
*
그다음부턴 아주 재미없는 이야기다. 나는 김원필의 집으로 찾아갔다. 전화도 뭣도 할 수 없으니까 그냥 쭈그려 앉아서 마냥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아주 지친 얼굴로 퇴근하는 김원필을 마주했을 때, 냅다 무릎부터 꿇었다. 애초부터 이러려고 온 거였으니까. 이렇게 값싼 자존심 그동안은 뭐 그리 꼿꼿하게 세웠을까. 후회해 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형.’
‘…….’
‘나 형이랑 헤어지기 싫어….’
김원필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내 앞에서 어떤 대답도 없이 서 있었다. 나는 바들바들 떨면서 선고를 기다렸다. 김원필이 다가와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먼지 묻은 바지를 툭툭 털어주었다. 그 손길이 무척 다정해서 울음이 나왔다.
‘도운아.’
‘…….’
‘얼른 가.’
나는 김원필을 아주 잘 아니까 단번에 알아차렸다. 진짜 끝이구나. 끝. 부정할 수도 없게 끝이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혀엉… 말꼬리를 늘이면서 김원필의 옷자락을 붙잡고 구질구질, 아주 더럽게도 매달렸다. 그래도 김원필은 안 된다고 했다. 돌아가, 도운아. 너무 늦었잖아.
‘싫어.’
‘…….’
‘여기 있을래….’
김원필이 가만히 나를 보았다. 그 얼굴에는 많은 게 담겨 있었다. 포기와 체념과 한숨과, 아무튼 나쁜 신호에 속하는 것들.
‘그래, 그럼.’
그 말만 남기고 김원필이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삑삑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김원필은 집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센서 등이 꺼질 때까지 가만히 굳어 있었다. 가까스로 벽에 몸을 기대자 센서 등이 다시 켜졌다. 나는 김원필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나는 아예 밤을 새울 작정으로 집 앞에서 버텼다. 현관문 앞에 털퍽 앉아서 꾸벅꾸벅 졸았다. 징그럽고 무섭다고 할지도 모르는데 그만큼 절박했다. 김원필 없이 살고 싶지가 않았다. 새벽빛이 아파트 복도로 스몄다. 나는 고개를 휘청이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길 반복했다. 에취, 기침을 하며 코를 훌쩍이는데 마침내 현관문이 열렸다. 잠옷 바람인 김원필이 나타났다. 나를 아주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나는 김원필을 올려다보았다.
김원필은 내 앞에 쪼그려 앉아 시선을 맞췄다. 길가에서 떨고 있는 고양이를 보는 것 같은 눈이었다. 가엾어라. 그렇게 지랄에 지랄에 지랄을 하더니 결국은 버림받았구나.
‘도운아.’
‘…….’
‘우린 다시 못 만나. 그러면 안 돼. 안 그럴 거고.’
‘…….’
‘그러니까 제발 가….’
김원필이 조금 울먹거렸다. 눈가가 축축해졌길래 뺨을 감싸고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김원필이 눈을 깜빡였다.
‘친구라도 하면 안 돼?’
‘…….’
‘잠깐도 좋으니까… 어? 제발….’
나는 바싹 마른 입술로 애원했다. 싫어할 거 아는데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매달렸다. 김원필은 눈에 힘을 주었다가, 잠깐 다른 곳을 보았다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는 안도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분간도 못 하고. 그땐 그게 김원필이 나를 좀 더 두고 봐준단 뜻인 줄 알았다. 기회를 주는 건 줄 알았다. 그렇게 몇 년을 밥 친구만 할 줄 알았으면, 그랬으면 그런 부탁은 안 했지. 청첩장까지 받을 줄 알았으면.
*
김원필과 나는 삐걱거리는 관람차에 앉아 바깥을 내다본다. 하늘에 뜬 구름은 움직이지 않는다. 꼭 캔버스에 그려 놓은 유화 같다. 조명이 켜지듯 하늘의 색만 조금씩 주황빛으로 물든다. 도무지 현실감이라고는 느껴지질 않는 게, 거대한 세트장 아래 서 있는 듯하다.
김원필과 나는 나란히 앉아 있다. 각자 앞만 바라보는 통에 시선도 맞지 않는다. 그제야 나는 왜 하필 여기였나를 되짚어본다. 대체 운행을 멈춘, 그러니까 공식적으로는 없는 관람차에 와서 뭘 하고 싶었냐는 말이지.
“네가 그런 거 맞구나.”
김원필이 읊조리고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어떻게 된 일이든 이 세계가 내 편이라는 것만은 확실했으니까. 김원필이 나에게 시선을 돌린다. 나도 김원필을 본다. 나는 표정을 읽으려 애쓴다. 원망하는 건가. 아니면….
“왜 그랬어.”
동정이구나. 김원필이 팔을 뻗어 내 손을 잡는다. 나는 맞잡은 두 손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생각해내려고 애쓴다.
“결혼 축하해.”
이걸 말하려 했던 건 아니고.
“키스해주라.”
이거였나.
“마지막으로… 한 번만.”
어차피 여기는 나와 김원필만 존재하는 세계니까. 이 정도는 죄가 되지 않을지도 몰라. 아무도 모르잖아, 그렇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감는다. 얼굴이 가까워지고 입술이 닿는다. 술 냄새 나던 첫 키스가 떠오른다. 짧고, 애매하고, 그럼에도 세상이 뒤흔들리는 것 같던. 깜빡, 깜빡, 나는 눈꺼풀을 여닫는다. 사랑하는 얼굴이 눈앞에 있네.
“미안해.”
나는 그제야 깨닫는다. 사실 이걸 말하고 싶었나 봐. 한 번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서….
좋아하면서 못되게 굴어서 미안. 당연히 내 미래에 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미안해. 나를 다 받아주길 바라면서 정작 나는 형을 시험해서 미안. 우리는 같이 있을수록 슬퍼졌으니까 헤어지는 게 맞았구나. 결국 형이 맞았어. 그래도 헤어지기 싫다. 그것도 미안해.
“알아.”
“…….”
“너 엄청 착하잖아.”
김원필은 잔잔히 미소 짓는다. 진짜 착한 건 자기면서 그렇게 말한다. 김원필은 나를 견뎌줬고 참아줬고 사랑해줬고 여기에 끌려와 주기까지 했다. 이만하면 할 건 다 한 거다. 이제는 마지막이구나. 슬퍼하지 않으려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슬퍼.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른다. 나는 촌스럽게 옛 애인 앞에서 훌쩍이는 남자가 된다.
“형.”
“…….”
“어떻게… 그렇게 나를 한 번에 버렸어. 형은 그게 됐어? 나는, 도저히 안 돼서… 형이랑 헤어진 게 아직도 가짜 같았나 봐. 형이 결혼한다고 하기 전까지도 그랬나 봐.”
나는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김원필은 내 등을 끌어안고 뒤통수를 쓰다듬어준다. 손이 따뜻해서 짜증 난다. 다정한 김원필. 착해빠진 김원필. 나는 아마 평생 김원필을 미워할 수 없을 것이다.
“도운아.”
“…….”
“너 진짜 착하고 괜찮은 애야. 그거 알아서 그랬어. 나 만나서 지치고 깎이는 게 싫어서, 그래서 헤어졌어.”
“…….”
“그리고 난 그거 후회 안 해. 나보다 더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 있을 거야. 너도 좋은 사람 만나. 나랑 밥도 먹지 말고, 소식도 듣지 말고, 응?”
나는 김원필 품속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솔직히 자신은 없지만 그래야 형 마음이 편할 테니 노력해 보기로 한다.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이니까.
만약을 상상해본다. 내가 형을 조금 늦게 만났다면, 그랬다면 나는 형한테 더 잘해줄 수 있었을까.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이를 이만치 먹고도 엉엉 우는 것을 보니, 어른스럽게 구는 건 시간의 흐름과 상관 없을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김원필은 나에게 또 이별을 말하겠지. 나는 또 슬퍼지겠지. 어차피 그렇게 될 거라면 나이 핑계라도 대게 일찍 만난 것이 다행이다. 그래도 형. 나랑 만난 걸 후회하지는 말아주라. 잊지도 말아주라. 그냥 마음 한구석에 묻어두고 있다가 재수 똥 밟은 날에 내가 이런 애도 이겨냈는데, 하는 추억으로라도 삼아 주라. 그러면 좋겠어.
관람차는 천천히 하강한다. 이제 내려야 할 시간이다.
*
우리는 웨딩카를 타고 결혼식장으로 돌아온다. 시간이 다시 흐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김원필을 제자리로 돌려보내야지. 형은 오늘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할 예정이었으니까. 신랑 예복의 끄트머리는 구겨졌지만 김원필은 여전히 멋지고, 그를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과 신부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떠났을 때와 꼭 같은 자세로.
우리는 버진로드 앞에 멈춰선다. 나는 몸을 돌려 김원필을 바라본다. 김원필도 나를 바라본다. 머뭇거리던 김원필이 손을 들어 조심스레 내 뺨을 감싼다. 김원필의 손바닥이 피부를 여러 번 쓸어내린다. 문득 매달리고 싶어져서 나는 눈을 감는다. 울 것 같은 기분을 참아내고 가까스로 김원필과 시선을 맞춘다.
“도운아.”
“…….”
“우리 도운이.”
김원필은 눈을 접어 웃는다. 꼭 어린애를 대하는 것처럼 나긋한 말투. 이런 목소리는 아주 오랜만에 듣는다.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
“…….”
“사실 나도 네가 보고 싶었나 봐. 보고 싶어서, 계속 옆에 뒀나 봐. 사랑은 끝났으니까 그러면 안 되는 건데도 그랬어. 너는 나한테 항상 예외라서….”
말끝은 조금씩 잦아든다. 파르르, 숨소리가 떨린다.
“미안. 보고 싶어 해서 미안해.”
“…….”
“우리 이제 다시는 보지 말자.”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알고 있었어. 이제 형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거. 우리가 했던 사랑은 너무 낡고 해져서 처음처럼 돌릴 수는 없는 거. 곁에 있어 달라고 떼 쓰려던 거 아니야. 그냥, 그냥…. 우리의 끝이 죄책감인 건 싫어서. 내가 형을 마지막엔 미워했다고, 그렇게 알고 있는 건 싫어서. 그래서 그랬나 봐.
“나도, 나도 고마웠어.”
“…….”
“나 형 많이 좋아했어. 앞으로 이렇게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 같이, 제일 많이 좋아했어.”
“…….”
“행복하게 살아.”
김원필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야 우리는 비로소 이별한다. 한 걸음 물러선 김원필은 좁은 길을 걸어 주례석에 다다르고, 신부를 바라보며 등을 세운다. 나는 원래의 내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심호흡을 하고, 두 손을 들고, 힘차게 박수를 친다. 새롭게 출발하는 부부를 위하여. 그걸 신호로 모두가 마법에서 풀려난다. 피아노 선율이 흐르며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한다. 적막하던 공간에는 따뜻한 빛과 생기가 스민다.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사뿐사뿐 걸어가 신랑의 손을 잡는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보고 웃는다. 그림처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김원필의 시선이 잠시 나에게 닿았다가, 떨어진다. 나는 미소 짓는다. 누구보다 큰 소리로 환호하며 손이 아플 만큼 박수를 친다.
*
나는 밥도 먹지 않고 식장을 빠져나온다. 아까 노을이 지던 것과는 달리 하늘은 아주 맑고 푸르다. 나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걷는다. 나를 이 동네에 붙들어둔 중력은 김원필이었는데 이제 김원필이 없으니 목적지도 없다. 나는 계속 걷는다. 이게 슬픈 건지 뭔지 잘 모르겠다. 그냥 싱숭생숭하고 허하고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은데 후련하기도 하고. 어찌 됐든 전보다는 나으니까 괜찮다.
어느새 안양천이다. 나는 다리 위에 서서 졸졸 흐르는 물줄기를 내려다본다. 이제 정말 시간이 다시 흐르는구나. 물도 흐르고 구름도 흐르고 사람들도 흐르고. 그럼 내 인생도 흐르겠지. 어디로든 흘러서 언젠가는 행복해지겠지. 하나의 중력이 사라지면 새로운 것을 찾으면 된다. 무엇을 잃어도 우주 밖으로 튕겨 나가지는 않는다. 또다른 하나를 찾아서 살면 그만이지. 그러니까 중요한 건 잘 끝내는 일뿐이다.
나는 두 손을 허리에 올리고 몸을 뒤로 쭉 젖힌다. 에구구, 할아버지 같은 소리가 흘러나온다. 나는 하얗게 흘러가는 구름을 구경하며 눈을 굴린다. 아, 날씨 한 번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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